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위키피디아를 통해 본 일본의 독도에 대한 생각 1

1. 서론

  위키피디아(이하 위키)의 내용은 분쟁이 되는 부분을 명확히 표시하고, 되도록이면 객관적으로 표현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어 버전의 위키피디아 설명을 보면, 일본인들이 독도에 대하여 어떤식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독도가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혹은 일본인들의 의견에 반박하고픈)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독도에 대한 위키피디아 일본어 버전을 해석하여, 일본인들이 대체로 독도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기에 밝혀 보도록하겠다.


2. 본론

<지금부터는 일본 위키에 실려있는 내용입니다.(파란 작은 글씨는 역주)>

다케시마독도(시마네현)
------------------------------------
  다케시마는 일본해동해의 남서부, 북위37도15분, 경도 131도52분에 위치하는 섬이다. 일본, 한국, 북한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고있다. 다케시마는 일본에서의 호칭으로, 한국과 북한에서는 독도, 제 3국에서는 리안쿠르암초(Liancourt Rocks) 라고 불리고 있다.

  1953년 민간인에의 무력행사를 시작한 한국의 점거에 대해, 일본은 '불법점거' 라고 항의한 반면, 한국은 '실효지배' 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양자의 주장은 평행선상에 있어서 일본이 국제사법제판소(ICJ)에 제소할것을 검토하자고 했지만, 매번 한국측은 거부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개요
  1905년(메이와38년) 1월 28일, 일본정부는 시마네현 오키섬 관사 소관의 다케시마라고 각의수상이 의제를 각 장관에게 돌려 그 서명을 받아서 결정하는 편법결정하고, 이후 일본에서 다케시마는 행정구역상 시마네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오키의섬 다케시마관유(島根県隠岐郡隠岐の島町竹島官有) 무(無)번지로 존재한다. 한국측은 그 당시 다케시마는 주인이 없는 땅이 아니라, 한국의 땅이라하고 시마네현으로의 편입이 무효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경상북도 울릉군 관할이다. 시마네현과 경상북도는 자매결연도시 관계였지만, 2005년에 일본이 다케시마의날을 제정하니 관계를 철회하였다.

  일본이 포기는 지역에 다케시마를 넣도록하는 연합국에의 한국의 요구는, 일찍이 조선의 일부였던적도 영유권을 주장한적도 없다고 거부되었지만,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직전의 1952년(쇼와27년) 1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이승만라인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설정하여 다케시마를 점령했다. 1965년(쇼와40년) 일한기본조약한일협정까지 한국에의해 이 라인을 넘은 것을 이유로 일본어선 328척이 나포되고, 일본인 44명이 사상(5명사망), 3929명이 억류되었다. 다케시마 근해에서는 16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없다.(이것을 한국측은 큰 피해를 당했다고함무단어획으로인한 피해를 말한다고 추정). 한국측의 해상보안청 순시선의 총격등의 사건은 15건에 이르고, 16척이 공격을 당했다.

1954년부터 2012년현재에 오기까지 한국이 무력으로 점거하고있지만, 일본은 매년 한국에 불법지배라고 구상서외교문서형식의하나를 제출하고있다. 그 결과 일본과 한국간에는 영토문제가 일어나고있다.


지리/자연
  어느쪽을 보나 상관없을 듯 하여 생략합니다.

영토문제
  일본, 한국, 북한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 일본의 행정구역은 시마네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정.
  • 한국, 북한에서는 독도라고 호칭하고,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현재 해양경찰청 산하에 대한민국해양수산부의 관리하에 있고, 한국과 북한은 자국의 최동단의 영토라고 하고있다. 이외 제 3국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으로, 1849년에 프랑스인이 붙인 리안쿠르암초라고 부르는 곳이 많다.

일한쌍방의 주장요약
  • 일본정부는 다케시마문제가 1952년 1월 18일에 한국의대통령-이승만의 해양주권선언에 의거한 어선출입금지선(이승만라인)에 따라 다케시마가 한국의지배하에 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으로부터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승만라인의 일방적 통지에대해 추후의 일한기본조약에따라 폐지한다는 사항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후에도 불법적으로 군사점령을 계속하고 있다.
  • 한국정부는 1905년 1월 28일에 일본정부가 다케시마를 자국에 편입하는 각의를 일방적으로 정하여 시작한 문제라고 말하고, 일본의 다케시마 편입이 한국병합한일합병의 시작이었다고 논한다. "유사영토분쟁을 만들어내는 것은 일본이다" 라고 주장하고, "일본과의 영토문제는 없다." 라고 말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하는 것을 거부하고있다.
다케시마 영유권분쟁의 발생
  1951년에 한국정부는 미국정에게 일본이 모든 권리,권원권리의원인 및 청구권을 포기하는 지역에 다케시마를 넣도록 요구했다. 여기에 미국정부는 "다케시마는 조선의 일부였다가 빼앗긴적이 없고, 1905년부터 시마네현 오키청의 관할하에 있어, 이 섬이 일찍이 조선으로부터 영유권 주장이 있었다고 볼 수없다." 라고 한국의 요구를 각하하였다.

  1952년 1월 18일에 한국정부에의해 이승만라인이 일방적으로 그어진 후, 일본정부는 동(同)월 28일에 "공해상의 선긋기에 항의하는 것과 함께, 다케시마에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참칭자기신분에 넘치는 칭호를 자칭함 또는 요구를 용납할수없다." 라고 말했다. 이 시점에는 한국이 정말로 영토권을 주장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2월 12일 한국은 반론을 제시하여, 이후 양국간에 문서를 교환하게 되었다.

한국은 국제사법재판위탁을 거부
  다케시마 영유권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세번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위탁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제안해왔지만, 한국측은 모두 거절하고 있다.
  • 일본정부는 1954년 9월 25일에 한국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할 것을 제안했지만 한국은 거부.
  • 1962년 3월에 실시한 일한외상회담 때에도,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郎) 외무대신이 ICJ 위탁을 제안했지만, 한국은 거부하였다.
  • 1962년 11월에 방일(訪日)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이 다케시마 문제를 ICJ에 위탁하자고 제안했지만, 한국측이 거부하였다.
  아직 당시 한국은 국제연맹에 가맹하고 있지 않았지만, 가맹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하는 것을 가능하다.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위탁은 분쟁당사국의 한쪽이 거부하면 재판을 하는 것이 불가능, 즉 강제관할권은 없다. 그리하여, 한국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다케시마 영유권분쟁은 ICJ에서 해결 불가능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영토문제를 ICJ에서 해결한 16건이상이다.

  한국측은 ICJ에의 위탁거부를 1954년 10월 28일의 공문에서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하겠다는 일본정부의 제안은 사법적인 것으로 가장한 거짓주장이고 또 하나의 계획영토를 뺏으려는 계획이라고 추정에 지나지않는다. 한국은 독도에 대해 처음부터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 권리에대해 확인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요구해야만할 이유를 인정할 수 없다. 어떠한 분쟁도 있을 수 없는데, 유사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일본이 아닌가"

  라고 기술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분쟁의 여부는, 객관적판정 또는 당사자간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고, 분쟁당사국중에 한쪽이 분쟁이 없다고 말하면 분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ICJ판결에서도 국제영토분쟁의여부는 객관적으로 판단해야만함실제본문에는 굵은글씨로 강조되어있음 이라고 확인되고 있다.

김종필에 의한 독도폭파 제안
  1962년 10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과의 회담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ICJ 위탁을 거부했지만, 미국무성외교문서집(務省外交文書集)에 따르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일본측에 다케시마문제의 해결책으로 다케시마 파괴를 제안하였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동경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오히라 외상과의 회담후, 미국을 방문했다. 1962년 10월 29일,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러스크 장관이 "다케시마는 무엇에 쓰이고 있나" 묻자, 김부장은 "갈매기가 똥을 누고있을 뿐" 이라고 답하고, 다케시마 파괴제안을 자신이 일본측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나중에 한국국내에서 "독도폭파제안설" 문제시되었을 때, 김종필 자유민주연합총재는 "일본에는 절대로 독도를 넘겨줄 수 없다는 의사표현이었다." 라고 변명했다. 또 2010년 조선일보의 취재에서 김종필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의 것이라고 판결이 났다고 해도, 전부 폭파해서 없애버릴지라도 너희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격양된 발언을 했다고 회상했지만, 이것은 미국무성외교문서집 "동북아시아1961-1963" 수록관련회담기록과는 내용이 다르다.

한국에의한 군사점령
  1951년(쇼와26년) 8월 10일에 러스크 서한에 따르면 "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 라고 미국정부의 의향을 한국정부에 보였다 라고 일본정부는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반년 후 1952년(쇼와27년) 1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자국의 지배하에 있다고 일방적으로 단언하고, 동시에 근해를 포함한 이승만라인을 설정한다. 1952년 7월 26일 미국정부와 일본정부는 다케시마를 미국군의 훈련지로 일본이 제공한다는 약속을 하는 협정을 체결한다.어이없어서 역자가 임의로 강조 1953년 1월 12일에 한국은 이승만라인 내에서 어획하는 일본어선을 철처히 나포할 것을 지시하고, 같은해 2월 4일에는 제1다이호오마루(第一大邦丸 - 선박이름)사건이 발생, 선장이 한국군의 총격을 맞고 사망한다. 같은해 4월 20일에는 한국의 독도의용수비대가 다케시마에 처음으로 주둔하고, 이후 점거를 계속하고 있다. 그로인해 현재 일본정부의 시정권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당초에 한국측의 불법점거라고 성명을 내어 항의를 계속하고, 또한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위탁을 한국측에 몇번이나 요청해 왔지만, 한국측은 "영토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위탁을 거부하고 있다. 2006년에는 김원웅의원이 국제법상의 영토분쟁으로 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진전되지 못했다.심층조사1 참고 실현되었다면 1954년이래 일본이 계속하여 요구했던 "국제적인해결" 을 한국이 받아들이는 형태가 되었을 것이었다.

<심층조사 1>

  대체 김원웅 이라는 사람은 누구길래, 일본인들을 이렇게 기대하게 만들걸까? 라는 생각에 이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본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출생 이력을 보면...

김근수,  전월선 독립운동가 부부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무려.. 백범 김구선생님의 중매하에 만난 결혼)

  혹시나, 친일파인가 싶어서 조사해봤는데.. 출생부터 비범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김구선생님께서 증명하는 독립운동가랍니다.

  시작부터 친일파라는 생각을 접게 만듭니다.

  정치경력은,

14대 총선 - 대전 대덕구 국회의원 당선(민주당)
16대 총선 - 대전 대덕구 국회의원 당선(한나라당)
17대 총선 - 대전 대덕구 국회의원 당선(열린우리당)


  국회의원 3선의 경력이 있습니다. 1995년에는 '정치부기자들이 뽑은 깨끗한 정치인' 선정이 되신적도 있군요. 중간에 한나라당에 어찌하여 입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가서 진보적인 발언을 일삼을 탓에 당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탈당 후 열린우리당으로 들어갔다고 하는군요.

  그 외에 독도와 관련된 발언을 한 것을 보니까, 아무래도 이 분은... 분쟁화가 되더라도 독도는 우리땅이 분명하므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오히려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증거가 많다며, 대마도를 국제적분쟁지역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2011년 4월, 상대당 구청장 후보를 비판하는 의정보고서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공직선거법 위반, 벌금형을 받은 경력이 있군요. 뭐 주 내용과는 벗어난 이야기지만...


  결론은,

  독도 국제분쟁지역화가 되는 것은 일본이 바라마지않던 일! 이분은 그저 판단미스를 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실을 잘 몰랐거나, 알았어도 이긴다고 굳게 믿었거나.

하지만, 당연한 우리 땅을 우리 땅이라고 제 3국에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요.

심층조사 1 끝.




이승만 라인과 일한기본조약
  이승만 라인도, 센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폐지된 맥아더 라인이승만 라인이 설정되기 전에 유지되고 있었던 조약을 이은 것으로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므로, 일본정부와 미국은 부당한 것이라고 항의하고 있다.

  1965년(쇼와40년)에 일한기본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한국군은, 이 라인을 넘었다는 것을 이유로 일본어선 328척을 나포하고, 일본인 44명(5명 사망 포함)을 사상하고, 3929명을 억류하였다. 한국측의 해상보안청 순시선의 총격 등의 사건은 15건에 이르고, 16척이 공격당했다.

  1965년박정희 정권 일한기본조약 조인으로 인해 이승만라인은 양국간에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또한 그 때 "다케시마 문제는 분쟁사항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조약을 체결하기위해 일한쌍방이 사실상 보류한 문제의 하나로, 그후 한국은 "다케시마의 영유권문제는 분쟁사항이 아니다" 라고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한양국의 분쟁의 평화적처리에 대한 교환공문

(위키피디아를 통해 본 일본의 독도에 대한 생각 2편에서 계속)

블로그 보관함